2020년 10월 5일 월요일

말씀의 역사가 세상에서의 역사가 되다 (요 1:9-13)

 13절의 말씀이 고백되어지기까지 나의 삶은 그분의 뜻에 합당한 삶이었는가?

나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강력하게 고백할 수 밖에 없다.

우리(그리스도인이라 자칭하는)는 지금까지 12절의 말씀에 쉽게 노출되어 살아 왔다.

이 은혜의 말씀이 나에게 믿어지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 쉽게 간과한 것이다.


이사야 1장은 우리에게 이렇게 전해준다. 

“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였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났도다.

~ 너희 땅은 황무하였고 너희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 토지는 너희 목전에 이방인에게 삼키웠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같이 황무하였고, "


사 60:2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


하나님의 영광은 여전히 시대적 암흑 속에 가리워져 있는듯 보인다. 또한 어둠은 이 시대의 심각성과 처절함과 긴박성 속에 은밀하게 위협하지만 달콤하게 다가온다.



이제 그리스도의 또 다른 이름(속성)인 빛에 대한 반응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 빛은 세상과 좀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 빛은 구속의 역사 속에 들어온 참빛으로, 각 사람에게 비춰진 계시이다. 

이 빛은 세상의 역사 속에 들어난 말씀이며, 성육신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초점이 옮겨진다. 

이 빛은 말씀의 역사가 이제 세상에서의 역사가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참 빛, 곧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셨고, 그분은 인류의 역사 속에 비추는 빛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

 


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참빛은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다.

이 빛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하였으며 하나님이신 분이다.

빛(말씀, 생명)이 만물을 지으셨으며 만물 안에 있었다. 

그리고 이 말씀이 만물을 충만하게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빛은 사람들의 빛이다.


빛 (생명, 말씀)이 어둠에 비취었는데 어둠이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중재자를 보냈는데 그가 요한이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었고, 그들에게 이 빛(생명, 말씀)을 믿게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요한은 중재자일뿐 이 빛이 아니였다. 그래서 참빛인 말씀이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여기 ‘세상’이 삼중적으로 강조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 빛이 세상에 계셨는데 그분을 알지 못했다고 보충 설명을 한다.


첫 번째 세상은 ‘인류에 의해 거주되는 세상을, 두 번째 세상은 인간을 포함하는 세상을, 세 번째 세상은 타락하고 암흑 속에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인류(3:16)를 나타낸다. - WBC 성경주석 // 내가 이해하기에는 좀 어려움이 있음.


그래서 나는 이 구절을 1~5절의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라 이해한다. 첫 번째 세상과 두 번째 세상의 간격, 두 번째 세상과 세 번째 세상의 간격에 유의해 볼 것이다.


10절은 "세상에 와서"로부터 "세상에 계셨으며"로 재빨리 이동한다. 

1절에서 그 말씀의 신성을 가르친 것과 똑같이 긴급하게, 10절은 이제 그 말씀이 세상으로 향하는 것을 가르친다. 

10절은 이제 그 말씀의 초월성과 도착하신 "그"의 내재성의 멋진 긴장을 유지한다. 흥미롭게도, 두 번째 절은 서언에 나온 낯익은 용어인 "왔다'라는 말을 재사용하면서, 창조가 말씀으로 뒷받침된 앞의 3-5절을 반영한다. 

세상에 도착한 분은 세상의 원천이시다. 세상의 창조자가 세상에 임재하신다. 

그리고 1절을 재진술하지만 새로운 맥락을 염두에 두는 2절처럼, 10절은 앞에 나온 세상의 창조 자체를 반영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새로운 정보는 세상을 지으신 분이 어떤 호칭이 아닌 인칭 대명사로 묘사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10절의 처음 두 절도 이제 인격적인 의미가 되어야 한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라는 것이다.


구약에 나온 "알다"의 의미를 여기에 적용한다면, 이 묘사는 단순한 지적 지식보다 더 포괄적인 것이다. 이것은 세상이 그분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겸손한 순종과 신뢰로 그분과 관계를 맺지 못했다는 것이다. // 강해로 푸는 요한복음


빛이신 말씀은 옛 선지자들에 의해 약속의 형태로 선포되어진다. 이 말씀(세상이 그를 알지 못함)의 전제는 인류의 타락성이요, 또한 구원과 심판이다.


빛이 세상에 와서 사람을 깨닫게 한다는 묘사는 이사야로부터 나온 메시아적 묘사이다.


사 9:2의 메시아적 평화의 왕에 대한 묘사는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두 번째 부분(42:6)에서 여호와는 자신의 종에게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고 선포하신다. 

세 번째 부분(60:1-2)은 예루살렘에 대한 분명한 음성을 듣는다. 

"일어나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오리라" 


하지만 아직은 이 빛이 세상에 있지 않고 말씀으로만 전해진 사실이다. 그래서 말씀이신 분이 직접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신다.


유일한 참 빛은 단지 '세상 속으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집과 백성이 되도록 특별히 선택된 장소(레 25:23; 렘 2:7, 16-18; 슥 2:12)와 백성(출 19:5)에게로 왔다.


성경이 이미 밝히고 있듯이 세상은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는 나그네로서 그분과 함께 살아야 했다. 하지만 택함 받은 백성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외면하고 오히려 거룩한 땅을 더럽히는 일을 자행한다. 말씀이 축복인 것은 선지자들을 통해 구속의 은총을 베푸는 소망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이다.  // 레슬리 뉴비긴 요한복음강해


자기 땅과 자기 백성 - 첫 절이 창조주와 그분이 만드신 세상 사이의 친밀함을 보여주는 반면, 두 번째 절은 사람과 그분의 인류 사이의 친밀함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11절에 나오는 "자기 땅"과 "자기 백성" 사이의 그리고 10절에 나오는 "세상" 사이의 이 미묘한 관계는 요한복음이 말하는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11절은 모든 피조물, 심지어 하나님이 더불어 언약을 맺은 백성이 그들 존재의 근원이며 충성의 대상이신 분을 거부했다고 분명하게 밝힌다.

본질적으로 10-11절은 사람이 되어 나타나신 말씀이 어떻게 거부당하셨는지 묘사한다. 결과가 하나님에 대한 거부라면, 원인은 정체성의 위기다. // 강해로 푸는 요한복음/에드워드 W. 클링크 3세


그래서 나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고백처럼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이라 고백할 수 밖에 없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을 전혀 상관없는 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은 그분의 영광의 임재로, 나를 초청하는 것으로, 회복시키는 위로로, 유일한 선물임에 틀림없다.


12절이 관계의 회복이라는 구절로 다가오는 것은 한량없는 영광의 회복을 의미한다. 

믿음으로 얻는 언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연결된다. 영접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자요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영광으로 초대된 관계를 맺는 것이다.


1:12에서 믿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에 대한 언급은 분명히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자녀로 묘사한 것을 기초로 한다(신 14:1, 출 4:22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 장자로 진술한 것을 보라). 그러나 1:11에서 "자기 백성"(즉 유대인)에 의해 말씀이 배척당하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에 이어서 나타나는 1:13에서 "혈통으로...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는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언급은 혈통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불법적이고, 주제넘은 주장과 하나님의 메시아에 대한 믿음에 의한 참된 하나님의 자녀됨을 구분한다. // 신약의 구약사용 누가.요한복음


서두에서 밝혔듯이 나의 믿음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존재를 알지만 그분을 나의 구주요 나의 하나님이라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예레미야를 통해 밝히신 것처럼 나의 믿음은 그분 안에 있는 살아계신 약속이다.


렘 31:33~3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어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020년 5월 5일 화요일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 (요 1:6-8)

만물의 시작이 말씀에 의해 계시되고, 말씀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앞 절에서는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말씀에 대해 소개되었다.
이제 보이는 세계와 계시된 말씀에 대해 소개할 한 사람을 소개한다.
급격한 시간의 역사가 흘러 예수님의 공생애에 접근하고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
'보냄을 받았다' 라는 동사는 전통적으로 누군가에게 어떤 메시지나 과업을 맡기다. 부과하다 혹은 위임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이것은 보내는 사람, 여기서는 신적 존재로 부여된 권한 부여로 강조된다. 
'...께로부터' 라는 전치사를 사용한 것은 특사의 위임자보다는 특사의 기원을 강조한다.

복음서 기자는 예수님의 공생애에 접근할 때 세례 요한의 증언에서부터 시작한다. 여기에서 염두에 둔 배경은 1세기 역사가 아니라 구원 역사다. 
그 구원 역사에서 하나님에게서 위임받은 혹은 "보내심을 받은"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선구자 역할을 했다. 왜 그 말씀에 대한 증언이 필요한가? "이 증언은 그리스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정해진 것이었다."

요한은 빛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해 왔다. 이 말씀은 빛이 필요한 사람, 즉 인간의 타락한 상황 조건을 드러내는 것이며, 
어둠이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이 인지되어지지 않은 채, 
알려지지 않은 채, 이 땅에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셨던 것이다.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이는 선포자의 임무를 명확히 해준다. 
그는 증언자이며 증언자는 자신이 말하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인 동시에 그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진리라고 알고 있는 것에 대하여 증언할 뿐이다.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이는 선포자의 목적을 말한다. 
즉 그의 청중으로 하여금 그 자신이 아니라 다른 것을 보게 하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승인하실 메시지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에 대하여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요 16:4)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사 43:10-1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내가 고하였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44:18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 눈이 가리워져서 보지 못하며 그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라"

요한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자(messenger)가 아닌 그리스도를 숭배한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원했다.

그는 자기 말을 듣는 자들에게 예수님을 가리키고, 예수님은 청중을 자신에게로 이끈다. 하지만 이 청중은 차례로 증인이 되고, 
그들을 통해 다른 사람이 믿음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완성된 이 복음서는 이러한 증인 중 한 사람의 증거에 기초한 것이며, 
그 목적은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믿음으로 그 이름 안에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 레슬리 뉴비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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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을 통해 비춰지는 나의 삶?

그것은 증언자의 삶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삶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하나님을 비추는 삶이 있다. 아니 하나님께서 비추는 삶이다.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삶이요 
통상적인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이 드러나는 삶이다. 

가짜 정보, 가짜 뉴스가 시대의 흐름을 어긋난 역사로 기록하려 한다. 
마치 자신의 존재가 가짜인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헛된 것에 힘을 다하여 수고하며 길들여 진다.
나도 그런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그들의 오류에 흘러내려 가듯이 동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두려워질 때가 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로 그의 삶을 하나님이 비추시는 역사 속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과업보다 위임을 맡기신 말씀이신 하나님께로 집중한다.
또한 1세기 역사의 중심에서 시대적 관망을 구원 역사로 인식하며 살아간다.
그가 살아온 증언하는 삶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우리의 삶에 빛을 비추는 삶이다.

요한이 빛에 대해 증언한 것은 그 시대의 어두운 단면 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나의 시대에 조명을 비추는 그리스도의 역사(나라, 구원)로 나를 초대하기 위함이다.
인지하듯이, 이 시대의 세계관은 우상이 비추는 조명에 의해 살아가는 정교하게 비틀어진 화석화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의 타락한 상황에서 어둠이 깨닫지 못하는 세계로 고착되어진  것이 인류에게 매인 죄성이 아닌가?
복음은 이런 세계에 반듯이 전해져야만 하는 생명의 빛이다.

절실하지 않은, 목표가 없이 표류하는, 적당한 안정감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그러면서 생물학적 본성으로 내 몰아가는, 삶의 이유가 없는 자연인으로 규정하는, 
무늬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는 메시지가 가슴을 치게 한다.

왜? 그리스도의 생명이 필요한가? 왜, 예수님인가? 
다른 이유가 없다고 성경은 단언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내 영광을 드러내려 함이라'(요 16:4)는 말씀 속에 있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인류에게 구원을 주는 메시지가 그의 시대를 비추는 빛으로 드러났다.
아직 승인되지 않은 복음이 세례 요한을 통해 전해지는 최종적인 구원의 선포가 막 진행되고 있다.

이사야가 전하는 말씀에도 내 삶의 이유를 밝힌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신 자로, 그분의 증인으로 사는 것은 '여호와는 나의 구원자이시다' 라고 명백히 선언하신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시대가 아니라 그분을 구원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오만함의 극치가 눈 앞에 펼쳐지고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분이시다. 
또한 나는 그 이름을 믿는, 그 이름 안에서 생명을 얻게 하는 능력으로 오늘 여기 있음을 가르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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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17일 금요일

계시의 말씀이 나타남 (요 1:1-4)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좋은 소식이다. 
이 복음을 들었던 수 많은 증인들이 있었고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그 복음을 듣는 자들은 유대인과 헬라인, 까다로운 종교인, 문맹의 하인들 등이다.

이들은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요? 하고 묻는다.

4 복음서는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모두 세례 요한의 사역을 중심으로 시작하고 있다. 
마가는 옛 선지자들의 말 속에 예견되어있었던 분으로 예수님을 소개하고, 
마태는 아브라함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누가는 훨씬 이전으로 돌아가서 아담과 함께 시작한다.
하지만 요한은 이것마저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밝히고 시작하기에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이 있기 전, 아담이 있기 전, 시간이 존재하기 전에 하나님이 계셨다고 소개한다.
만물이 창조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행위로 이루어진 것이라 선포한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말씀은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 외에는 창조할 수 있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그 계시의 말씀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 말씀의 본문을 예수님으로 인도한다. 그 말씀은 '그 분'이라고 하는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이며, 시간이 있기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다.
이렇게 우리의 예수님은 이 책의 주인공(말씀이 육신이 되어)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말씀'(the Word)이라는 이 호칭은 창세기의 창조의 말씀, 선지자와 전도자의 입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 스토아 철학자의 로고스, 
그 단어를 사용해서 헬라 사상과 히브리 사상을 통합시키려 했던 다양한 학파의 로고스 등의 이미지다. 
하지만 우리는 이 진리를 예수님이 바로 말씀이라는 것, 그분 안에서 만물이 창조되었고 그분 안에서 만물이 존속되고 있다는 것(골 1:16-17), 
그분이 곧 복음이요 그분의 이름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 곧 자신을 계시하는 행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을 담지한 분이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5:26). 
그러나 이 생명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생명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온 것은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의 '영생 곧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주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 나의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요한의 말씀처럼 그분은 내 안에 생명을 가지고 오신 분이요 나의 하나님이요 나의 창조주라고 고백하게 한다.
호모 사피엔스가 인류의 진화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라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 창조주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명백하게 가르쳐 주는 복음이다.

요즘처럼 생명이 조롱받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명예(영광)가 곤두박질쳐지는 시대를 사는 가운데 나는 몇몇 성경의 인물들을 묵상하게 된다.
바이러스 하나로 세계적인 인류의 위험이 우리에게로 다가왔지만 생명을 주신 말씀되시는 하나님이 이 위기를 지혜롭게 이겨내도록 함께 하심도 감사하다.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세계적인 폐쇄의 연결고리로 묶어 두었지만 나는 그것을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고백을 전한다.
이 바이러스를 극복한 후에도 사람들은 일상적인 승리에 도취되어 살아갈 것이다. 
과학으로 인류의 생명을 연장하는 비법을 깨우치더라도 그것(과학)이 죽음의 본질을 깨뜨릴 진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인류에게 가르쳐주기 위함이 아닐지 생각해본다.

마지막으로 요한의 메시지가 내게 주는 선교적 명령은 이것이다. "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4)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요 내 안에 계신 분이요 내 안에 빛이 되신 분이다. 내 안에 계실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빛이다. 
세례 요한이 중심이 되는 세상에서 혹은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하는 세상에서 예수님은 여전히 그분의 빛을 세상에 비추고 계시다. 
그분의 이름은 영광이요 그분의 이름은 말씀이요 그분의 이름은 전세계적인 하나님이시다.
*/

// 말씀 후기 : 이 말씀을 묵상하기 전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여쭈었다. 
세계는 점점 더 폐쇄적이 되어 가고 사회적 안전망을 위해 고립으로 몰아가며 서로를 분리하며 관계를 축소하고 
믿음을 불투명하게 하며 소극적이게 만들고 생기를 잃게 만든다. 역동적 에너지를 눌러 극도로 몽롱하게 만드는 것, 그것을 무엇이라 하는가?
이기적 안전을 무기 삼아 종교를 압박하고 예배의 자율성을 훼손하게 만드는 것, 사실 이것은 바이러스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이기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하나님은 이 세계에 바이러스의 전염을 허락하셨지만, 이 세상은 그것으로 세계를 가두려 하고 있지 않은가? 
말씀은 메이지 않으며 찬송은 침묵을 위해 존재하지 않음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지금의 상황을 모세 시대의 재앙으로 (유월절을 준비해야 하나?), 요셉의 시기에 축복과 심판으로 (경제적 안전망을 구축할 방법은?), 
욥의 시대에 고난으로 (어떻게 나의 건강과 복지를 유지할 것인가?) 여겨 지혜를 구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바랐었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착각일 뿐이고,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선거가 끝난 이 즈음, 내게 시대를 읽을 줄 아는 지혜는 없다손치더라도 예배의 소중함과 생동감을 잃지 말자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묵상함으로 깨닫게 된다.
아! 날카로운 카리스마와 담대함이 있었더라면? 제왕의 품위와 리더십이 있었더라면? 하는 욥의 친구들처럼 세상 것을 목말라 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살았더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유일한 비전은 하나님을 향한 열망과 말씀에 대한 묵상이 아니던가? 이것이 나의 유일한 기쁨이요 즐거움이라, 하나님의 선물(사명)이라 고백할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