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절의 말씀이 고백되어지기까지 나의 삶은 그분의 뜻에 합당한 삶이었는가?
나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강력하게 고백할 수 밖에 없다.
우리(그리스도인이라 자칭하는)는 지금까지 12절의 말씀에 쉽게 노출되어 살아 왔다.
이 은혜의 말씀이 나에게 믿어지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 쉽게 간과한 것이다.
이사야 1장은 우리에게 이렇게 전해준다.
“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였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났도다.
~ 너희 땅은 황무하였고 너희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 토지는 너희 목전에 이방인에게 삼키웠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같이 황무하였고, "
사 60:2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
하나님의 영광은 여전히 시대적 암흑 속에 가리워져 있는듯 보인다. 또한 어둠은 이 시대의 심각성과 처절함과 긴박성 속에 은밀하게 위협하지만 달콤하게 다가온다.
이제 그리스도의 또 다른 이름(속성)인 빛에 대한 반응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 빛은 세상과 좀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 빛은 구속의 역사 속에 들어온 참빛으로, 각 사람에게 비춰진 계시이다.
이 빛은 세상의 역사 속에 들어난 말씀이며, 성육신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초점이 옮겨진다.
이 빛은 말씀의 역사가 이제 세상에서의 역사가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참 빛, 곧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셨고, 그분은 인류의 역사 속에 비추는 빛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
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참빛은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다.
이 빛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하였으며 하나님이신 분이다.
빛(말씀, 생명)이 만물을 지으셨으며 만물 안에 있었다.
그리고 이 말씀이 만물을 충만하게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빛은 사람들의 빛이다.
빛 (생명, 말씀)이 어둠에 비취었는데 어둠이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중재자를 보냈는데 그가 요한이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었고, 그들에게 이 빛(생명, 말씀)을 믿게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요한은 중재자일뿐 이 빛이 아니였다. 그래서 참빛인 말씀이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여기 ‘세상’이 삼중적으로 강조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 빛이 세상에 계셨는데 그분을 알지 못했다고 보충 설명을 한다.
첫 번째 세상은 ‘인류에 의해 거주되는 세상을, 두 번째 세상은 인간을 포함하는 세상을, 세 번째 세상은 타락하고 암흑 속에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인류(3:16)를 나타낸다. - WBC 성경주석 // 내가 이해하기에는 좀 어려움이 있음.
그래서 나는 이 구절을 1~5절의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라 이해한다. 첫 번째 세상과 두 번째 세상의 간격, 두 번째 세상과 세 번째 세상의 간격에 유의해 볼 것이다.
10절은 "세상에 와서"로부터 "세상에 계셨으며"로 재빨리 이동한다.
1절에서 그 말씀의 신성을 가르친 것과 똑같이 긴급하게, 10절은 이제 그 말씀이 세상으로 향하는 것을 가르친다.
10절은 이제 그 말씀의 초월성과 도착하신 "그"의 내재성의 멋진 긴장을 유지한다. 흥미롭게도, 두 번째 절은 서언에 나온 낯익은 용어인 "왔다'라는 말을 재사용하면서, 창조가 말씀으로 뒷받침된 앞의 3-5절을 반영한다.
세상에 도착한 분은 세상의 원천이시다. 세상의 창조자가 세상에 임재하신다.
그리고 1절을 재진술하지만 새로운 맥락을 염두에 두는 2절처럼, 10절은 앞에 나온 세상의 창조 자체를 반영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새로운 정보는 세상을 지으신 분이 어떤 호칭이 아닌 인칭 대명사로 묘사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10절의 처음 두 절도 이제 인격적인 의미가 되어야 한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라는 것이다.
구약에 나온 "알다"의 의미를 여기에 적용한다면, 이 묘사는 단순한 지적 지식보다 더 포괄적인 것이다. 이것은 세상이 그분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겸손한 순종과 신뢰로 그분과 관계를 맺지 못했다는 것이다. // 강해로 푸는 요한복음
빛이신 말씀은 옛 선지자들에 의해 약속의 형태로 선포되어진다. 이 말씀(세상이 그를 알지 못함)의 전제는 인류의 타락성이요, 또한 구원과 심판이다.
빛이 세상에 와서 사람을 깨닫게 한다는 묘사는 이사야로부터 나온 메시아적 묘사이다.
사 9:2의 메시아적 평화의 왕에 대한 묘사는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두 번째 부분(42:6)에서 여호와는 자신의 종에게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고 선포하신다.
세 번째 부분(60:1-2)은 예루살렘에 대한 분명한 음성을 듣는다.
"일어나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오리라"
하지만 아직은 이 빛이 세상에 있지 않고 말씀으로만 전해진 사실이다. 그래서 말씀이신 분이 직접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신다.
유일한 참 빛은 단지 '세상 속으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집과 백성이 되도록 특별히 선택된 장소(레 25:23; 렘 2:7, 16-18; 슥 2:12)와 백성(출 19:5)에게로 왔다.
성경이 이미 밝히고 있듯이 세상은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는 나그네로서 그분과 함께 살아야 했다. 하지만 택함 받은 백성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외면하고 오히려 거룩한 땅을 더럽히는 일을 자행한다. 말씀이 축복인 것은 선지자들을 통해 구속의 은총을 베푸는 소망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이다. // 레슬리 뉴비긴 요한복음강해
자기 땅과 자기 백성 - 첫 절이 창조주와 그분이 만드신 세상 사이의 친밀함을 보여주는 반면, 두 번째 절은 사람과 그분의 인류 사이의 친밀함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11절에 나오는 "자기 땅"과 "자기 백성" 사이의 그리고 10절에 나오는 "세상" 사이의 이 미묘한 관계는 요한복음이 말하는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11절은 모든 피조물, 심지어 하나님이 더불어 언약을 맺은 백성이 그들 존재의 근원이며 충성의 대상이신 분을 거부했다고 분명하게 밝힌다.
본질적으로 10-11절은 사람이 되어 나타나신 말씀이 어떻게 거부당하셨는지 묘사한다. 결과가 하나님에 대한 거부라면, 원인은 정체성의 위기다. // 강해로 푸는 요한복음/에드워드 W. 클링크 3세
그래서 나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고백처럼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이라 고백할 수 밖에 없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을 전혀 상관없는 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은 그분의 영광의 임재로, 나를 초청하는 것으로, 회복시키는 위로로, 유일한 선물임에 틀림없다.
12절이 관계의 회복이라는 구절로 다가오는 것은 한량없는 영광의 회복을 의미한다.
믿음으로 얻는 언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연결된다. 영접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자요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영광으로 초대된 관계를 맺는 것이다.
1:12에서 믿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에 대한 언급은 분명히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자녀로 묘사한 것을 기초로 한다(신 14:1, 출 4:22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 장자로 진술한 것을 보라). 그러나 1:11에서 "자기 백성"(즉 유대인)에 의해 말씀이 배척당하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에 이어서 나타나는 1:13에서 "혈통으로...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는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언급은 혈통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불법적이고, 주제넘은 주장과 하나님의 메시아에 대한 믿음에 의한 참된 하나님의 자녀됨을 구분한다. // 신약의 구약사용 누가.요한복음
서두에서 밝혔듯이 나의 믿음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존재를 알지만 그분을 나의 구주요 나의 하나님이라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예레미야를 통해 밝히신 것처럼 나의 믿음은 그분 안에 있는 살아계신 약속이다.
렘 31:33~3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어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