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좋은 소식이다.
이 복음을 들었던 수 많은 증인들이 있었고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그 복음을 듣는 자들은 유대인과 헬라인, 까다로운 종교인, 문맹의 하인들 등이다.
이들은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요? 하고 묻는다.
4 복음서는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모두 세례 요한의 사역을 중심으로 시작하고 있다.
마가는 옛 선지자들의 말 속에 예견되어있었던 분으로 예수님을 소개하고,
마태는 아브라함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누가는 훨씬 이전으로 돌아가서 아담과 함께 시작한다.
하지만 요한은 이것마저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밝히고 시작하기에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이 있기 전, 아담이 있기 전, 시간이 존재하기 전에 하나님이 계셨다고 소개한다.
만물이 창조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행위로 이루어진 것이라 선포한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말씀은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 외에는 창조할 수 있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그 계시의 말씀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 말씀의 본문을 예수님으로 인도한다. 그 말씀은 '그 분'이라고 하는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이며, 시간이 있기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다.
이렇게 우리의 예수님은 이 책의 주인공(말씀이 육신이 되어)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말씀'(the Word)이라는 이 호칭은 창세기의 창조의 말씀, 선지자와 전도자의 입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 스토아 철학자의 로고스,
그 단어를 사용해서 헬라 사상과 히브리 사상을 통합시키려 했던 다양한 학파의 로고스 등의 이미지다.
하지만 우리는 이 진리를 예수님이 바로 말씀이라는 것, 그분 안에서 만물이 창조되었고 그분 안에서 만물이 존속되고 있다는 것(골 1:16-17),
그분이 곧 복음이요 그분의 이름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 곧 자신을 계시하는 행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을 담지한 분이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5:26).
그러나 이 생명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생명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온 것은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의 '영생 곧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주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 나의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요한의 말씀처럼 그분은 내 안에 생명을 가지고 오신 분이요 나의 하나님이요 나의 창조주라고 고백하게 한다.
호모 사피엔스가 인류의 진화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라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 창조주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명백하게 가르쳐 주는 복음이다.
요즘처럼 생명이 조롱받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명예(영광)가 곤두박질쳐지는 시대를 사는 가운데 나는 몇몇 성경의 인물들을 묵상하게 된다.
바이러스 하나로 세계적인 인류의 위험이 우리에게로 다가왔지만 생명을 주신 말씀되시는 하나님이 이 위기를 지혜롭게 이겨내도록 함께 하심도 감사하다.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세계적인 폐쇄의 연결고리로 묶어 두었지만 나는 그것을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고백을 전한다.
이 바이러스를 극복한 후에도 사람들은 일상적인 승리에 도취되어 살아갈 것이다.
과학으로 인류의 생명을 연장하는 비법을 깨우치더라도 그것(과학)이 죽음의 본질을 깨뜨릴 진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인류에게 가르쳐주기 위함이 아닐지 생각해본다.
마지막으로 요한의 메시지가 내게 주는 선교적 명령은 이것이다. "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4)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요 내 안에 계신 분이요 내 안에 빛이 되신 분이다. 내 안에 계실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빛이다.
세례 요한이 중심이 되는 세상에서 혹은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하는 세상에서 예수님은 여전히 그분의 빛을 세상에 비추고 계시다.
그분의 이름은 영광이요 그분의 이름은 말씀이요 그분의 이름은 전세계적인 하나님이시다.
*/
// 말씀 후기 : 이 말씀을 묵상하기 전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여쭈었다.
세계는 점점 더 폐쇄적이 되어 가고 사회적 안전망을 위해 고립으로 몰아가며 서로를 분리하며 관계를 축소하고
믿음을 불투명하게 하며 소극적이게 만들고 생기를 잃게 만든다. 역동적 에너지를 눌러 극도로 몽롱하게 만드는 것, 그것을 무엇이라 하는가?
이기적 안전을 무기 삼아 종교를 압박하고 예배의 자율성을 훼손하게 만드는 것, 사실 이것은 바이러스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이기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하나님은 이 세계에 바이러스의 전염을 허락하셨지만, 이 세상은 그것으로 세계를 가두려 하고 있지 않은가?
말씀은 메이지 않으며 찬송은 침묵을 위해 존재하지 않음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지금의 상황을 모세 시대의 재앙으로 (유월절을 준비해야 하나?), 요셉의 시기에 축복과 심판으로 (경제적 안전망을 구축할 방법은?),
욥의 시대에 고난으로 (어떻게 나의 건강과 복지를 유지할 것인가?) 여겨 지혜를 구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바랐었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착각일 뿐이고,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선거가 끝난 이 즈음, 내게 시대를 읽을 줄 아는 지혜는 없다손치더라도 예배의 소중함과 생동감을 잃지 말자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묵상함으로 깨닫게 된다.
아! 날카로운 카리스마와 담대함이 있었더라면? 제왕의 품위와 리더십이 있었더라면? 하는 욥의 친구들처럼 세상 것을 목말라 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살았더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유일한 비전은 하나님을 향한 열망과 말씀에 대한 묵상이 아니던가? 이것이 나의 유일한 기쁨이요 즐거움이라, 하나님의 선물(사명)이라 고백할 수밖에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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